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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시모음
청마 유치환 (1908~1967)
통영에서 8남매 중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유치진이 그의 형이다
23세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으나 문학청년과 어울려 술만 마셔
그의 아내는 신학공부를 권유하였으나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평양으로 이주해 사진관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시작을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일제의 검속 대상에 몰리면서 잠시 만주로 나갔다가 1945년 37세 되던해 통영으로 돌아와서
부인은 유치원을 경영하고 윤이상, 김춘수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통영여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 경주여중,대구여고,부산여상 교장을 지냈다.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통영여고. 둔덕중,대구여고,부산고 ,동래고등 , 시비가 시인들 중에 가장 많다.
경주불국사, 부산에덴공원, 통영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위 시는 청마 유치환이 시조시인 이영도를 사모하여 지은 시이다
청마유치환과 정운이영도가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다
경북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세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하나를 둔 29세 과부였다
문제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가 해방되던 해 가을에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만주로 떠돌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청마는 정운보다 9살 많은 38살로 유부남이었다
정운은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한다
그때부터 청마는 정운을 사모하여 매일 정운에게 연서를 보냈으나 정운은 유교적인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청마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사랑의 시편들에 바위같이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정신적인 사랑은 시작되었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이들의 마음은 거북하고 안타까웠다
이때의 심경을 청마는 이렇게 표현했다
<행복>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크러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름다.
-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