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무제 1>은 정운의 첫 시조집 청저집(靑䇡集)에 실렸던 작품이다

청마와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 (1916 ~ 1976)

1940년대말 ~ 1950년대말 10여 년간 통영에서 머물렀고

50년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떠나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뇌출혈로 세상을 마감했다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부산에서 불의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사랑도 끝이나고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세상에 알려졌다.

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뛰운 연서는 모두 5000여통이었다

정운은 꼬박꼬박 보관해두었던 편지중에 2000여통을 추려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했었네>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라는 시를 통해 그녀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탑(塔)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여사에게 -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길이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예, 당신과는 생각만이라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