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glo <메뉴/>
1.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 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2. 내 갈 길 아득히 멀고 나의 힘 기진한데 내본향 집을 향하여 가는 길 비추소서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생명의 말씀
서울주보//2021.3.25
이광휘 베드로 신부//사회사목국 이주사목위헌회 위원장
로마 성지순례 때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벽화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으로 가는 통로에 있던 벽화인데, 주인공인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움직입니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예수님의 눈과 몸체가 같이 움직이며, 예수님의 시선이 성화를 보는 그 사람을 향한 채로 계속 따라오는 그림이었습니다.
오늘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로 교회는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수난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시선을 생각해봅니다. 그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쓰러지는 순간에도 나만을 생각하셧다는 듯, 그 시선은 나를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너 때문이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당신께서 그자리에 그렇게 넘어지셔야했던 이유가 바로 나 자신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필리 2.8 참조)
그런데, 예수님의 '너 때문에'라는 말은 결코 원망 섞인 탄식의 외침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수난기의 베드로가 닭이 두번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처럼(마르 14.66-72 참조) 네가 수없이 나를 모른다고 배반해서, 네가 그 모양이어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질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기꺼이 목슴까지 바칠 수 있다는, 당신 사랑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예수님께서 나약하고 비천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이유도, 그리고 오늘 수난기에서처럼 당신 목슴을 바치신 이유도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완전한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수난 중이신 예수님은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시며, 수난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당신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으십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6)
오늘 수난기의 예수님은 그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나의 목슴값으로 구한 너인데,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나와 함께 이 길을 가겠느냐?" 예수님은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사랑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의 목슴값으로 구한 소중한 삶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랑의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