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UN 회의를 하느라 제네바에 있었습니다. 주일미사는 조용하게 드리고 싶어 근교 성당에 갔다가 우연히

리차트 버턴의 묘지를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나오는 절생긴 영국

남자배우입니다. 들꽃이 무성한 묘지 앞 비석에는 '리차트 버튼 1925~1984년' 이라고만 쓰여 있더군요. 그렇게 유명했던

배우라면 '나는 배우다' 정도의 묘비명은 있을 법한데 말입니다.  왜 갑자기 묘비명 타령이냐고요? 실은 얼마 전 참가한

영성수련 과정 중에 했던 '유서와 묘비명 만들기'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지금 삶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가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첫 번째 교제는 유서 쓰기, 가족들에게 "모두들, 내가 떠난다고 슬퍼 말아요 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니까요"라며 쿨하게 시작한 유서가 어느새 노트 다섯 장을 넘겼습니다. 우선 제 인생을 환하고 풍요롭게 해준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면서 정말로 고마웠다고 썼습니다. 그리고는 저로 인해 상처받았을 사람들과 제가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어쩌나 눈물이 나던지요. 다행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소리내어 엉 엉

울면서, 촛농처럼 흐르는 눈물을 공책 위로 뚝뚝 떨어뜨리며 써 내려갔습니다. 왜 그렇게 미안한 사람이 많이 떠오르든지요

좀 더 참을 걸, 좀 더 따뜻하게 대할 걸, 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걸.....그러나 얼굴을 마주보며 더이상 미안하다 말할 수

없으니 더욱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과제는 묘비명 만들기, 솔직히 저는 지금 죽고 싶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도,하고 싶은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신체 건강하고 정신도 매우 건강한 이런 새파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 아닙니까?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각본대로 '내일'이 제 마지막 날이라면 저는 기꺼이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떠나겠습니다.

이 무대의 '총연출' 이신 하느님은 그동안 저라는 '배우'에게 딱 맞는 역을 주셨습니다. 가끔 제 역량 밖의 일을 마끼실 때면

도대체 날 어떻게 믿고 이러시나 하는 두려움과 감사함으로 온 몸을 떨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맡은 역활에 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열정,에너지,기도 등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일을 아낄

이유도,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다 총연출자인 하느님께서 "네 역활은 여기까지 이제 무대에서 아웃!" 이라고 명하시면

기꺼이 무대를 내려갈 것입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는 안녕."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제 묘비명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 몽땅 다 쓰고 가다"

묘비명 생각 때문인지 초여름의 신록이 더욱 눈부시고 찬란하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계절을 충분히 감사하고 찬미하는 것, 이것이 언젠가는 무대를 내려갈 우리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아닐까요?

 

             《 말씀의 이삭 》에서

                           - 한비야 비아 // UN자문위원, 이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