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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 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2. 내 갈 길 아득히 멀고 나의 힘 기진한데 내본향 집을 향하여 가는 길 비추소서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1960년대 말, 뉴욕에 살고 있던 화가 '김환기'는 어느날 오랜 친구였던 '김광섭'의 시를 읽었습니다
당시 김환기는 가나과 고독에 지쳐있었습니다. 그럴 무렵 긴 투병 끝에 놀라운 기적으로 소생한 김광섭이 펴낸
시집에서 그는 눈이 번쩍 띄는 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의 제목은 <저녁에>, 이 시를 읽는 순간 김환기는 자신이 버림밥은 존제라는 것을 이겨내고 그립고 다정한
얼굴들을 생각하며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지는 점묘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그리게 됩니다 김환기에게 말년의 대표작을 낳게 한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아름다운 시처럼 그대와 나는 그 많은 별 중에서 내가 점찍은, 또한 그대의 별이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나만을
점찍은 이 순간만의 절대적인 만남의 정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밝음과 어둠이며
그야말로 절대의 운명입니다.
주님에게 있어 죽음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에게는 멸망이요 영원한 작별이며
떠돌며 우는 슬픈 일이지만 주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부활이며 영원한 만남이며 다만 잠을 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린 소녀가 죽었을 때도 라자로가 죽었을 때도 주님은 죽음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다만 잠들어 있어 그들을
깨워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영적으로 '죽은자;를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라"(공동번역 마태오 8.22)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당나라의 조주도 제자가 죽자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말했습니다 " 수 많은 죽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가고 있구나" 그렇게 보면 김광섭의 시처럼 죽음은 정다운 우리가 무엇이 되어 다시 또 만날 수 있는
그 어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나의 하느님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밝히는 밤하늘의 별이 되어 그 어디에서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잠든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여 주소서.
"탈리타 쿰(일어나라)" (마르코 5.41)
故 최인호 베드로 (작가)
유고집 '눈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