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2015.4.5 서울주보

 

     예수님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알랠루야!

 

   빈 무덤 이야기로 묘사되는예수님의 부활 증언은 그 `때`에 대한 묘사부터 조금은 색다른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흔히 초대교회 부활신앙 정식에 자주 등장하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표현 대신에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표현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의 특별한 예수님 사랑을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2) 사실, 그 당시 무덤을 강탈하는 강도의

예는 드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40년경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내린 `무덤을 훼손하거나 시신을 훔치거나 무덤을

막은 돌을 치운 자는 무거운 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이니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아마포가 놓여 있고 얼굴을 쌌던 수건이 따로 잘 개켜져 있었다`는 복음사가의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어느 강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상황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강도가 `수건을 따로 잘 개켜둘`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당시로써는 꽤 비싸고 값나가는 `아마포와 수건`을 두고 갈

강도는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직접 묘사가 아니라 `빈 무덤`에 대한 기사로 증언됩니다.

`부활 사건` 그 자체는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고 필설의 묘사를 넘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었다`라는 표현은 단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빈 무덤의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믿게 되었다`고 이해되는데, 문장 표현에는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홀로 `보고 믿은` 것으로 나오지만 어찌

그 제자만 그 순간을 믿었을까요,

자신의 한 많은 삶을 용서해 주시고 온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해 주신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이른 새벽부터 달려온

마리아 막달레나, 결정적인 순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나 모두, 그 `빈 무덤`을 본 순간,

생전에 예수님께서 여러 번 예고하셨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남`을 그때서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덤` 때로는 우리 고단한 삶이 `무덤`에서 안식처를 구하기도 합니다

갖가지 형태의 `무덤`이 우리를 가두고서는 `쉼`을 준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가치와 타협하고 안주할 때, 우리는 `무덤` 안에 머무르는 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고 새롭게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 정순택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