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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 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2. 내 갈 길 아득히 멀고 나의 힘 기진한데 내본향 집을 향하여 가는 길 비추소서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 왜고개 성지 위치//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 40길 46)
한 겨울 답게 바람이 찹니다. ` 대한이가 소한이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 는 말이 실감 나는 날입니다.
우람한 군종교구청 건물이 보이네요. 여느 성지와 달리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듭니다. 군종교구가 한국천주교회 16개 교구 중
가장 늦은 1989년에 출범하여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군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한 교구여서 그런 걸까요.
교구청 옆 계단을 올라 국군 중앙 주교좌 성당에 들어섭니다. 무소부재의 하느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섭니다. 성당 바로 옆에
`왜고개 성지` 현판이 소박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왜고개는 와현(瓦峴),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굽던 곳이었답니다. 명동성당과 죽림동약현성당을 지을 때도 이곳 벽돌을 가져다 썼다고 하는군요. 협소한 성지의 간이지붕 밑에
선 십자고상이 더욱 외롭게 보입니다.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순교자 현양비에는 이곳에 묻혔던 열 분의 순교자 명단이 새겨져 있네요.
박순집 베드로는 몇몇 신자들과 함께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도리 신부, 성 우세영 알렉시오,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과 성 최형 베드로의 시신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야말로
목슴을 건 일이었지요. 그의 용감한 거사로 왜고개는 새남터 순교자 7위가 33년간, 서소문 순교자 2위가 43년간 안식하는 성지가
되었지요. 아울러 이곳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미리내로 이장되기 전에 잠시 묻혔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안장 되었던 순교자 8위가 1984년에 성인품을 받는 영광스러운 땅이 되었던 겁니다.
신라의 원광 법사는 삶의 도리를 묻는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주었습니다. 그 중 `임전무퇴(臨戰無退)` 하라는 계율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지요. 전쟁터에 나가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군인의 기상이니까요.
우리의 순교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곤장을 맞아가며 모진 고초를 당하고, 얼굴에 회칠을 하고 귀에 화살을 꽂은 뒤
머리가 잘리거나, 머리채가 기둥에 묶인 뒤 참수당하는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순교자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증거하였지요. 하나밖에 없는 귀한 목슴을 초개같이 여기면서요.
그토록 장렬하게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을 과원 몰래 빼내 안장한 박순집 베드로의 용기도 대단합니다. 그의 목슴을 건
용기와 두려움 없는 신심으로 인해 순교자 153명의 행적이 환히 밝혀졌거든요. 지금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 박순집 증언록 > 3권에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손답게
용맹무상하였던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군종교구청이 들어선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합니다.
성지를 나서는 순례자의 어께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건 왠일일까요.
-서울주보에서 옮김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