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면서, 아예 시작할 때 결론을 내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특별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출을 낸 것도 아니고, 자기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을 괴롭힌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상의 상식과 우리 신앙의 진리는 길이 서로 엇갈립니다.

부자가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소출을 얻고, 그것으로 자신의 곳간을 채우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평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돈처럼 지극히 세속적인 것들을 이용하셔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생각에 빠져들다 보면, 평화를 청하는 가운데 곧잘 평화를 위해 돈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을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목적이 뒤바뀌어서 평화의 근원이신 주님보다 재물을 먼저 청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얻을 평화의 근원이 주님이 아닌 재물로 옮겨갔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 살아가야 할 우리 안에 우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우상 앞에서 우리를 평화롭게 해 달라고 빌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중심에 재물이 놓인 이들은 자기 삶을 재물로 평가하고, 하느님의 힘도 재물로 평가하게 됩니다.

내 것은 내것이고, 이 모두가 내 업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사람은 내 삶 조차 하느님의 것이고 지금의

내 모든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언제든 없어질 수 있고, 그것을 쓰는 것도 내 뜻에 맞춰서가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남을 도우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고,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돌보게 됩니다.

평화를 자기 곳간에서 찾는 부자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되찾아갈`것임을 선언하십니다.

내 영혼조차 `내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께서 되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가 그런 것이니, 우리가 사는 중에 얻고 잃은 것들을 두고 `내 것`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미 그 점을 알았나 봅니다. 옛날 경주 최부자 집 가훈에는 "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앙을 모르던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이 역시 자기 곳간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자기 곳간을 채우면서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당함`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 탐욕조차도 넘어서야만 우리는 진정 평화로위집니다

안심할 만큼 재물을 얻어야 오는거짓 평화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신 만큼 누리고 그분 쓰시고 싶은 데에 쓰시게 해 드리면서 얻는

참 평화. 우리 발걸음은 그 둘 중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 서울주보 2016.7.31

                                                    생명의 말씀 // 손경락 사도요한 신부 / 가톨릭대학 성심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