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효창원로 15길 37)

 

   쪽빛 가을 하늘이 가깝게 보이는 산머리의 용산 성당에 들어섭니다.  사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이라 가슴이 탁트이는

느낌이네요. 성당 옆 비탈에 묘소들이 다섯 단으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군요. 직사각의 야트막한 봉분과 바닥을 덮고 있는

푸른 잔디가 평온하게 보입니다. 명당의 제일 조건이 배산임수라 하였던가요. 앞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잘 어울리는 풍광입니다.

 

   1887년 용산 에수성심 신학교가 건립되면서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성직자 묘지를 만들었답니다. 그 후 이곳에 삼호정

공소가 설립되면서 4위의 주교, 64위의 사제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었던 것이지요.

맨 앞줄 가운데에 `主敎蘇公之墓(주교소공성지묘)`라는 비석이 눈에 뜨입니다. 초대 조선 감목인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년)의

묘소입니다.

 

      조선은 1660년에 설정된 중국 남경 교구에 속해 있었습니다.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에는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 관할에 놓여 있었구요. 17910년애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서 신자들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제도를

금지하는 한편, 조선에 성직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지요.  마침내 1794년에 복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파견 되었지만,

신유박해 때 순교하고 말았지요.

 

   그러자 성 정하상과 성 유진길 등이 조선에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교황청에 청원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파리 외방전교회가 관할하도록 하였지요.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방콕의 보좌

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가기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조선대목구의 초대 감목으로 입면되었던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 대륙을 횡단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시련을 겪으며 3년만에

만주의 교우촌에 도착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뇌일혈로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입국한 선교사가 바로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2대 조선 감목인 성 앵베르 주교였던 겁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모방 신부가 수습하여 그곳에

묻혔지만 1931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100주년을 맞아 지금 이 묘지로 이장하였지요.

 

  치명하기를 각오하고 길을 나섰던 선교사가 그토록 가고 싶어하던 땅에서 영면하게 된겁니다.

목자를 학수고대하던 양 떼 곁에서 쉬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가요. 파란 하늘 아래 누운 벽안의 이방인 사제가 부르는 찬미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시편 23.1~2)

 

   //  교황님이 축복하신 성지 순례길

                    신앙선조의 숨결을 따라//                      

                                                                                  김무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