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현장터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723-3)

          2017년 6월 25일 서울주보에서

 

    맑고 푸르른 날, 빨간 덩쿨 장미가 길가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군요. 장미화관을 뜻하는 로시리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슬그머니 주머니에 있는 묵주를 꺼내드니 다소 먼 길에 나선 순례자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포천 시내에서 반월교를 건넙니다. 바로 앞으로 포천천과 구읍천이 만나는 지점에 `홍인 레오 순교터`라는 표지판이 보이네요.

순천교구 춘천교구에서 관리하는 성지입니다. 아담한 공터에 순교현양비가 서 있군요.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38~1801)는 한양에서 포천으로 내려와 살면서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지요

초기교회 설립의 주역으로 양근에 살던 권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가 그의 고종사촌이었으며, 마제에 살던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복자 정철상 가롤로가 그의 사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와 접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홍교만은 천주교를 학문으로 받아들였을 뿐, 신앙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들인 복자 홍인 레오가 자신에게 교리를 배운 뒤 먼저 신앙생활을 하였던 겁니다.  홍인은 부친을 권면하는 것이 효도라 여기고, 천주교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며 입교하기를 설득하였지요. 쪽에서 나온 푸른색이 쪼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네요.  마침내 부자는 1794년 말에 입국한 복자 주문묘 야고보 신부에게 함께 세례를 받았답니다.

 

   1801년에신유박해가 터지자 부자는 사돈인 정약종의 책상자를 집안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런데ㅔ 교우가 그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 불들리면서 부자 또한 체포되었지요.  홍교만은 한양 포도청과 의금부로 끌려가 신문을 받으며 "저는 이미 예수의 강생을 알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뉘우쳐 예수가 그러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4월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한편, 홍인은 포천현 감옥에 갇혔다가 경기감영과 포도청과 형조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듬해 1월 30일 고향인 포천 저자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지요.  붉은 피를 뿌려 포천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던 겁니다

 형조의 사형 신고문이 강경합니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다, ....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왕방산 기슭의 포천성당 안에 영광의 화관을 쓴 부자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네요.

복자들을 대하며 우리는 오늘 어떠한 죄를 짓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 자신과 가문의 영달을 위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정의를 증거하기 위한 죄(?)를 얼마나 충실하게 짓고 있는지 성찰하게 되는군요,

불의에 맞서 진리를 선포하고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서 만 번 죽임을 당해도 아깝지 않은 죄 말입니다.

 

    김문태 힐라리오// 서울 디지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