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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 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2. 내 갈 길 아득히 멀고 나의 힘 기진한데 내본향 집을 향하여 가는 길 비추소서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제물진두 순교성지
(인천 광역시 중구 제물량로 240)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삼복의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날, 인천역 앞에 섰습니다.
바로 앞으로는 차이나타운의 화려한 거리가 펼쳐져 있군요.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전쟁 때 인천 상륙작전을 펼쳤던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자유공원이지요. 대로를 따라 잠시 걷자 우람한 한중문화관과 닻줄로 보이는 쇠사슬이 쌓여있는 큰 공장사이에 인천교구
해안 본당이 관할하는 성지의 간판이 보이네요. 워낙 좁은 땅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지니치기 십상이군요. 골목같은 입구로 들어가자 폭은
좁지만 15미터애 달하는 드높은 경당이 환합니다.
조선시대에 종4품의 수군만호가 있던 제물진두는 1845년에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하여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하이로
떠난 곳이자 병인박해 이후 열 분이 순교한 곳입니다. 1868년에 부평에 살던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인 박순집의 이모인 김씨.남편 손넙적이
베드로,사위 백치문 사도요한, 그리고 행적 미상인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체포되어 한양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여기서 참수형을 받았지요
그리고 1871년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의 토마스의 아들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가 인천 바닷가에서 미군 함정을 살피다 체포되어
처형되었고요. 이어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정씨의 손자 이(손)명현, 그리고 이름만 전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이곳에서 순교하였지요.
제물진두에서의 순교는 1866년에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이끄는 군대가 강화도에 침략한 병인양요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어 1866년에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네런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나자 1871년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고종은 이 신묘양요가 터진 원인을 천주교인에게 두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포도청에서 하는일이 요사이 매우 허술하여 사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못하므로 서양오랑케들이 침략해오게 하였다. 이후에는 더욱 잘 살펴 나쁜
무리의 종자가 남아있지 못하게 하라.`( 고종실록 1871년 5월 25일 ) 또한 홍성대군은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케와 싸우는 한편 이에 부합하는
자들을 척결하라고 명령하였고요, 이에 따라 미국 군함과 접촉을 시도하였던 이승훈의 증되었던 손자들이 여기서 참수되었던 겁니다.
당시의 관문이었던 한강 변의 양화진두와 제물진두 포구에서 천주교인들을 공개 처형함으로써 본때를 보이려 하였던 것이지요.
긴 의자가 놓인 경당에 앉아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품었던 뜨거운 신심을 되새겨봅니다. 작고 비좁은 경당에 어울리는 순교자들의
삶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군요.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목슴을 바친 치명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낌니다.
피 흘려 하느님을 증거하였던 분들을 기리는 성지에서 흘리는 삼복더위의 땀이 무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2017. 8.20 서울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