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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 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2. 내 갈 길 아득히 멀고 나의 힘 기진한데 내본향 집을 향하여 가는 길 비추소서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성지순례길 // 수도권
인천광역시 강화군 북문길 41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파란 하늘이 드높은 날, 강화대교를 건넙니다. 바다의 짭짜름하고 비릿한 냄새가 차창으로 스며드는군요. 읍내 기슭에 고려궁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네요. 1232년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맞서 개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 39년간 항쟁하였던 곳이지요. 그 바로 아래 인천교구 강화성당 안에 진무영 순교 성지가 있군요.
진무영(鎭撫營)은 한양의 관문인 강화도를 지키기 위하여 1700년에 설치한 종2품 군영이었습니다. 그런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를 비릇한 9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지요. 그때 리델 신부는 조선 신자 10명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훗날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이 된 그는 조선에 남아있는 페롱 신부와 칼레 신부를 구출하는 한편,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구해줄 것을 자국에 요청하였던 겁니다. 이에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강화도에 상륙하여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의 서적과 은괴 등을 약탈한 병인양요가 터졌지요. 그러자 홍성대원군운 강화유수에게 진무사 및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여 진무영을 정2품 군영으로 승격시키고 기구를 강화하였답니다. 의정부에서는 `서양배가 멀고도 먼 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 무리들이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고종실록; 1866년 10월12일) 라며 그 무리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고요. 그러한 와중인 1868년 장치선, 최인서(영준), 박서방, 조서방 등이 이곳 진무영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장치선은 성 장주기 요셉의 조카로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켰습니다. 몇 달 뒤에 병인양요가 터지자, 리델 신부를 태우고 강화도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여 박해 상황을 박해 상황을 전해주었지요. 한양의 애고개 회장이었던 최인서(영준) 역시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할 때 함께 있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에 올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 모두 효수형을 당하였던 겁니다. 아울러 박순집 베드로의 형인 박서방과 조참봉의 부친인 조서방도 함께 처형되었고요. 이들의 행적은 //승정원일기//(1868년5월22일)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사학죄인 장치선과 최영준은 양인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의 진상을 모두 자복했다고 합니다.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군민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 순교한 분들은 조선교회의 참혹한 상황을 알려 성직자와 교우들을 구하고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백척간두의 살벌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슴을 걸고 외국 신부와 함께 중국을 오갔으며, 외국 군함에 승선하였던 겁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천주를 이 땅에 알리고자 한 순수한 열정과 견결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지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 우리는 어디에 목슴을 걸고 지내는지 새삼 되짚어봅니다.
2017년.10월.15일 서울주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