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의 삶


              聖 현석문 가롤로 / 축일 9월 20일

 

  칼날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때마다 번쩍이는 빛이 눈부셨다. 석문은 빛 저 너머,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읆조리듯 말했다.

" 지금이군요. 천주님"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지난날이 떠올랐다. 7년 전, 1839년 겨울이었다.


     매몰찬 바람만큼 석문의 마음에 아린 괴로움이 불어왔다. 누님인 현경련 베네딕따, 아내인 김게레사, 아들인 은석마져 천주님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하지만 이내 괴로움 대신 자랑스러움과 감사함이 차올랐다.  죽음은 곧 천주님을 끝내 배신하지 않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팠지만, 죽음의 이유는 아프지 않았다.  40여 년 전, 아버지 현계흠 베드로가 '천주쟁이'란 이름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은 이후로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다. 다만, 그 때를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저도 가서 천주님을 증거하겠습니다"

 석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먼저 떠난 가족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지금쯤 천국에서 천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을 터였다. 가족만이 아니었다. 앵베르 주교님을 비롯한 수많은 교우가 석문의 곁은 떠나 천주님과 함께였다. 오직 자신만이 부질없는 육신의 생명을 붙잡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포도청으로 달려가려는 석문의 두 다리를 선교사들이 막아섰다.

  "안됩니다. 형재님마저 떠난다면, 앵베르 주교님이 맡기신 일은 누가 한단 말입니까?"

   " 맞습니다 형제님은 형제님의 일을 하십시오. 천주님을 증거하는 일이 꼭 죽음뿐만은 아닙니다." 그 말에 석문은 주저 앉았다.

몇 달 전. 앵베르 주교님은 그동안 자신이 해 오던 일을 석문과 몇몇 신자에게 부탁하고 떠나셨다.  이 나라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 부탁을 받은 신자 중, 남은 사람은 이제 이문우, 최영수, 석문까지 세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그 일보다 석문은 목슴을 바치고 싶은 열망이 더 강했다. 당장에라도 포도청에 달려가 '나에게는 오직 천주님만이 전부' 라고 외치고 싶었다.

   " 왜 저는 아닌가요. 왜? 왜 저에게는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회를 주시지 않는 건가요?"

    석문은 하늘을 향해 수많은 '왜'를 외쳤다.


  석문은 1846년에야 그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다.

    "저는 지금이었군요 천주님!"


  ※ 덧: 1840년에 이문우. 1841년에 최영수마저 순교하자, 성 현석문 가롤로는 홀로 다른 교우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이어갔다.  성 현석문 가롤로는 이 기록을 1845년 페레올 주교에게 전하고 그다음 해에 순교했다. 이 기록이 바로 '기해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