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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비 문찬인
요즘은 송년 모임도 일찍 시작한다. 12월엔 날을 잡기가 쉽지 않아 11월 모임도 많다. 산이 좋은 사람은 같이 산에 오르는 것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본 뒤 차 한 잔 하는 것으로 송년회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은 저녁먹고 술먹고 하면서 정담을 나누는 게 대세다.얼마 전 밥 먹고 커피 마시는 부부동반의 송년 모임에 다녀왔다. 예전에는 거의 월급장이였는데 대부분 은퇴해서 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야 회사 다닐 때는 몰랐는데. 바깥은 지옥이다. 나와보니 쥐꼬리만 한 월급이 그렇게 큰돈인지 이제 알 것 같다.” 퇴직하고 쉬니까 좋다던 친구의 얘기다. 그는 지금 후배들만 만나면 “비온 날 쓸어도 쓸어도 떨어지지 않는 아스팔트 위의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서 회사 오래 다니라”고 충고 하고 있다.
우아한 노년을 보내는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퇴직후에는 바라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병고(病苦),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가 그것이다. 아프거나 가난하거나 외로운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몸과 마음이 아직 팔팔한데 할게 아무것도 없는 고통은 정말로 견디기 힘들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마누라 치맛자락 부여잡고 따라 다니니 젖은 낙엽같다는 멸시도 받는다. 덕분에 도서관, 문화센터등에서 개최하는 각종 강좌가 노인들로 성황을 이룬다. 얼마전 어느 단체에서 주최한 하루짜리 부여 나들이에 신청자가 폭주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하는 일이 없으면 외롭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분은 10여개의 각종 단체에 가입하여 일정을 소화하고 있기도 한다.
노인 한 분이 길가에 벌려놓은 좌판에는 밭에서 캐온 농산물들이 빈약하게 진열되어 있다. 겨울철이 되면 그 노인은 힘겹게 군 고구마 장사를 한다.그런데 그 노인 주변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서너명의 또래들이 항상 붙어 있다. 농산물도 같이 손질해주고, 고구마도 다듬으면서 새우깡과 소주를 아껴 마신다. 그들은 마땅히 갈데가 없어 노점상 할아버지의 좌판에 빌붙어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일이 없으면 스스로를 비관하게 된다. ‘정말 나는 이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인가?’ ‘내가 이 삶에서 하여야 할 역할이 끝났는가?’스스로가 비참해지고 그 자괴감은 동짓 섣달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한다. 몇 년 전엔가 유행했던 ‘무서운 아내’ 시리즈가 있다. 50대 부인이 가장 무섭게 느껴질 때는?
답은 ‘부엌에서 곰국을 끓이고 있을 때’이다. 이유는 곰국을 한 솥 가득 끓여 놓고 친구들과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60대 아내가 무서울 때는?
‘이삿짐 쌀 때’이다. 새로 이사가는 집을 알려주지 않은 채 부인 혼자만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남편은 이삿짐 차가 오면 얼른 조수석에 올라타야만 한다. 그럼 70대는?
부인이 어디 먼 곳으로 여행 가자고 할 때이다. 왜냐하면 낯선 곳에 가서 남편을 버리고 올 수 있기 때문이라나? 이 시리즈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생 부인에게 큰소리만 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남편을 헌 가구 버리듯이 버릴 수 있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은듯하니 초조하기 이를 데 없다. 직장생활을 접고 별다른 활동이나 취미생활도 없이 그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나이 든 남자들을 ‘젖은 낙엽족’이라고 부른다.
마른 낙엽은 산들 바람에도 잘 날아가지만 젖은 낙엽은 빗자루로 쓸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좀 태워보려고 해도 연기만 매캐할 뿐 아무짝에도 쓸 수 없는 버려지지도 않는 존재들이다.
일본 도쿄대학의 한 여교수가 만들어냈다는 이 단어는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이 부인에게 성가신 존재가 된 남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직장을 그만 두었으니 직장 동료와도 멀어지고 특별한 취미도 없으니 자연히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평생을 바깥에서 활동했던 남편은 대낮에 집안에 있는 것에 익숙지 않고, 아내 또한 그러한 상황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구속으로까지 느껴지면서 불화가 일어나게 된다.
최근 일본의 선마크라는 보육 서비스 회사에서 자신이 젖은 낙엽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많은 가를 측정하는 자가 진단 리스트를 만들었다.
체그리스트중에는 깨우지 않아도 혼자서 일어난다/ 스스로 이불을 펴고 갠다./ 청소기를 사용할 줄 안다./ 세탁기를 쓸 줄 안다./ 밥을 지을 수 있다./ 라면, 달걀 프라이 외에도 할 줄 아는 요리가 있다./ 설거지를 할 수 있다./ 단추를 달 줄 안다./ 속옷이나 양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집에 중요한 서류가 있는 장소를 안다./ 혼자 장을 볼 수 있다./ 혼자 집에서 즐길 수 있다.(TV시청 제외)/ 가끔 화분에 물을 준다./ 쌀이나 야채 가격을 알고 있다.......... 등이 들어 있다. 즉 부인이 곰국을 끓여 놓고 여행을 떠나도 혼자서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젖은 낙엽 신세는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화려했던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보내고, 이제는 모진 겨울 바람에 길가에 나뒹굴게 된 쓸쓸한 낙엽이다.
비록 나무로부터 버려졌지만 아직은 더 버티고 싶다. 내리는 비에 내 몸을 젖은 낙엽으로 만들어 처절하게 버티어 본다. 이렇게라도 살아 남는게 이기는 걸까?
글쎄다